정원목사님의 카페에 갔더니 다음과 같은 메모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올려 놓습니다.

 다른 이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자기 인생이 행복하지 않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불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오직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자신의 잘못된 태도로 인하여 고통을 겪으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피동적인 존재가 아니며 삶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전적인 책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의식과 자세를 수정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결코 해방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과 생각을 바꾸고 새롭게 할 때 비로소 사람은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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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ewdaily.co.kr/html/article/2010/02/08/ARTnhn403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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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8 17:30 최고의 선물-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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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8 17:17 최고의 선물-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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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 가면을 벗어라'에서 래리 크랩은 욕구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 무언가에 대한 허무함을 느낄 때가 있다. 류시화시인의 책제목처럼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리웠던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무언가에 대한 갈망,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알베르토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처럼 햇살이 너무나 따사로워서 살인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적도 있었을 것이다. 너무나 따사로운 햇살 가운데로 찾아드는 섬뜩하고 차가운 허무함을 느껴 본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떠한 형태였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외로움이나 허탈함이나, 무의미함등을 경험하고 또 잊어버리고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이러한 인간실존의 불완전성과 완전함에 대한 갈망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감과 공험함에 대해서 래리 크랩은 세 가지욕구로 설명을 하고 있다.

1. 일상적인 욕구

  일상적인 욕구는 사소한 바램에서부터 중대한 소원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바램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는 비교적 제어할 수 있는 불편함을 경험한다. 비록, 그 불편함이 때로는 너무 고통스러운 경우도 있지만, 일상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인간으로서의 나의 존재가 위협을 받지는 않는다. 기본적인 욕구와 가장 큰 차이는 관계성이다. 일상적인 욕구는 타인과의 관계가 전제되어 있지 않는 욕구이다. 즉,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욕구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이며 개체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 식당의 음식이 내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다'라든가, '건강검진 결과가 긍정적으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램들이다.

2. 기본적인욕구

  배우자에게 사랑받고, 존중을 받는 것, 자녀들이 행복하고 책임감 있는 생활을 하는 것, 필요할 때는 함께 있어 줄 수 있는 친구를 원하는 것 등의 바램이다. 의미있는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욕구이다. 즉, 기본적인 욕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채워 질 수 있는 것이다. 개별적인 일상적인 욕구와는 달리,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좌절을 겪게 되면 제어하기 힘든 불편함을 경험하기도 한다. 살다보면 한 번쯤은 관계 속에서 감정의 폭발을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그 대상이 배우자이든, 자녀이든, 직장동료이든, 지나가는 사람이든 말이다. 폭발이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는 영혼의 에너지가 소진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시간이 흐르고 다른 일들로 바빠지면 생활에 대한 활력이 되살아 나고, 이전과 같이 즐거움을 느끼면서 책임감을 회복하게 된다.
 
3. 근본적인 욕구

 우리 인간은 아무런 조건 없이 완전한 사랑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영향을 받도록 지음을 받았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욕구를 채워 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해결하기 힘든 고통이 뒤따른다. 이 고통은 시간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심연의 고통이다. 이러한 깊은 고통 속에 있을 때 세상의 위로와 즐거움은 목마른 나그네에게는 한 줌의 모래, 한 방울의 물에 불과 할 뿐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갈증인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 갈증을 가지고 살아간다. 인식하지 못하거나, 무시하거나, 부정하거나 도피하며 살아 갈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욕구가 만족되지 않은 삶은 언제나 공허하고 무의미한 지옥같은 삶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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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4시 정원목사님의 '부르짖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기도의 종류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통성기도와 묵상기도로 나눌 수도 있는 것 같다. 정원목사님의 또 다른 책, 예수호흡은 묵상기도라고 할 수 있고, 부르짖는 기도는 통성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원목사님은 우리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 기도를 들어 주신다고 한다. 이스라엘백성도 갈급할 때면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들어 주셨다고 한다. 또한, 우리나라 교회가 부르짖는 기도에서는 최고였는데, 부르짖는 기도가 약해지면서 교회의 부흥도 함께 시들해졌다고도 말씀하신다. 어찌 되었든, 나의 경우에는 묵상기도도 좋지만, 통성기도를 통해서 기운을 북돋우는 것이 좋을 같았다. 묵상기도 호흡기도는 깊이는 깊어지지만, 그만큼 기운이 정체 될 수도 있으니, 오늘 새벽기도에서는 통성으로 주님을 크게 불러 봐야겠다.

새벽 5시 뒤따르는 스포티지가 급하게 달려서 지나친다. 어디를 저리고 급하게 가시나 했는데, 영락교회앞에 차를 세운다. 기도가시느라 그리도 급하게 가셨구나! 예배당에 들어서니 아직은 조용하고 어둑하다. 오른쪽 앞열에 앉아서 성경책을 펼치니 박정수목사님이 자리하신다. 
 "오늘은 로마서 1장 25절말씀까지 교독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16절과 17절말씀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신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박정수목사님은 바울이 그러하였듯이 우리 또한 우리를 통하여 복음이 세상에 전달될 수 있는 메신저가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 아멘!

 "통성으로 주님 세번을 외치고 기도하겠습니다."
박정수목사님이 늘 말씀하시는 통성이 부르짖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굳이 통성으로 큰 목소리로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정원목사님과 박정수목사님을 통해서 부르짖는 기도를 알려주셨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과 더불어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건강한 모습으로 이 곳까지 나올 수 있는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할 수 있는 입과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곳까지 오면서 생각했습니다. 보았습니다.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들, 나의 모든 생각, 이불, 대문, 엘리베이터, 자동차, 하늘, 별, 얼음, 서리, 아스팔트, 산에 들려오는 바람소리, 그 어느 하나도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단 한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단 한 개도. 하나님 아버지, 저의 교만과 저의 사랑과 저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하여 주시고, 저를 채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부디 제 손을 잡으시고,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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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자기계발서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믿는 대로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웃어 넘기고, 어떤 사람은 진실로 믿음을 가지고 뭔가를 하기도 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한 사람 이상이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면 한번쯤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또한, 꿈을 그리고,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세워서 시각화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날들이 모이면 원하는 바를 꼭 성취할 것도 같다. 다만, 우리는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 어떤 목표를 정해서 매진해야 할까? 돌진없는 목표는 허무함이요, 방향성이 없는 돌진은 무모함이라고 칸트가 말했다. 그러니 돌진과 목표가 모두 중요하다면, 돌진 이전에 방향성에 대한 고민의 시간 또한 진정한 돌진을 위해서 꼭 필요한 정적인 돌진상태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예전에는 훌륭한 사람, 커다란 저택, 고급승용차, 여유로운 여행들을 꿈꾸었고, 보물지도까지 만들어서 거실벽에 붙여 놓은 적도 있었다. 거실에 걸린 보물지도를 볼 때면, 뿌듯하기도 했지만,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인생에서 빠져 버린 느낌이랄까? 얼마 전에서야 그 허전한의 실체를 찾았다. 그것은 하나님이었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목표요 꿈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허상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만드신 피조물일뿐이니,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보물지도에 붙여 놓은 그 많은 것들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일뿐이요, 그것이 목적이나 꿈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믿음에 관해서 히브리서에는 다음과 같이 구절이 나온다.

히브리서 11장 0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1장 0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
                         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1장 0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11장 15절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순서상으로 믿음 다음 현실이 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믿는 것이다. 그러니 믿음은 곧 실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하나님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늘 그 곳에 계신다. 우리가 우리의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사건은 보기에 따라서 별 것이 아닌 사건일 수도 있지만, 산골짜기에 사는 늙은이가 엄청나게 큰 배를 엄청나게 많은 시간동안 제작한 것은 이미 그 자체로 기적이다. 노아의 믿음을 상상해보면 아찔할 만큼 크고 높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경멸과 무시는 노아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하나님의 명령과 부르심만이 노아인생에는 유일한 꿈이었고 목표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하늘을 향한 꿈과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보물지도는 그 다음 할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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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계획
 지난 해 12월부터 우연히 다시 가게 된 교회, 아무 생각없이 나에게 닥친 고통을 해결하고자 나가게 된 교회, 그 작은 발걸음이 엄청난 바람이 되어서 내 인생을 뒤집어 놓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때 나에게 주셨던 그 고통, 우리 가족에게 닥쳐 왔던 그 고통 또한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획하셨던 일인 것 같다.

*기도의 변화
 지난 해 12월, '하나님! 제가 지금 이런 상태에서 저런 상태로 가고자 합니다. 하나님! 저런 상태로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라고 기도했었다. 한 마디로 내 뜻대로 일이 될 수 있도록 당신 뜻을 사용해달라는 거다.
 마태복음을 읽어 보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다.

마태복음 26장  39절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아멘-

 이 구절을 읽으면서 그야말로 아멘을 연발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또한 몸을 가진 인간으로서 고통을 회피하고 싶어셨나보다. 당신이 할 수만 있다면 이 고통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당신의 뜻대로 하라고 말씀하셨다. 온전한 내려놓음이었다. 

*버릴 수 없는 나의 의지
 나는 왜 이런 기도를 할 수 없는가? 두렵기때문이다. 내려놓는 것이 두렵다. 모든 것은 다 드릴 수는 있지만, 도저히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것 한 가지를 여전히 손에 쥐고 있기때문다. '좋아요. 다 당신 뜻대로 하는 데, 이것만큼은 내가 가지고 있고 싶어요!'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망할 놈의 버릴 수 없는 나의 의지!  지금까지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소경이 되어서 앞사람의 손을 잡고 가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이 되었다면, 전적으로 앞사람의 손을 꼭 잡고 순순히 따라 가야 할텐데, 이 길이 아니라고 고집피우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나의 기도
 오로지 한 분, 당신, 하나님의 뜻대로 나를 채우소서! 그 길이 어떠한 길이든 순순히 따라가겠습니다. 당신의 쓰임대로 나를 쓰임받게 하여 주소서! 온 몸에 힘을 빼고 당신 손을 잡고 따라 걷고자 합니다. 제 손을 꼭 잡아주시고, 놓지 말아주소서! 제가 성공하고 돈도 많이 벌고 풍요롭게 산다면, 그것은 당신을 위해서 사용하기 위한 금은 보화일것이고, 제가 가난과 곤궁함에 처한다면 그 역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를 지켜 봐 주시고 계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대로 이 세상을 살아왔음을 회개하고 반성합니다. 이제 나의 남은 모든 시간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 뜻대로 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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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은 거룩한 삶을 약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룩한 삶이 가난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불교의 무소유나 유교의 영향으로 돈을 만지는 상인을 천시하는 경향이 유구한 역사를 통해서 우리 뇌 속에 각인되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교에도 유마거사처럼 거상이 되어서 풍요로움을 누리신 분이 계시듯 거룩한 삶과 가난한 삶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것은 왜곡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도 성경속에서 요셉이나 다윗이나 솔로몬등을 통해서 언제나 풍요로움을 약속하고 축복하신다. 단,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 또한 그 분이 창조하셨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릴 권한 또한 우리에게 주셨다면, 풍요로움을 약속하고 실현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풍요롭게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실현 시켜야 하지 않을까?
 오늘 아침에도 기도했다. 나에게 원하시바가 무엇인지, 내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시는지.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길이 맞는지. 그리고, 모든 일이 그 분의 뜻대로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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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과바위
2010/01/29 09:28 최고의 선물-오늘

1991년 봄, 대구에 있는 한 교회에서 문득 떠올랐던 질문이다. 믿음은 느낌에 속하는 것일까, 아니면 의지에 속하는 것일까? 그 당시, 나는 하나님을 느끼고 싶었고, 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만질 수도 없었고, 느낄 수도 없었다. 다만, 성경책만 부여 잡고 기도를 할 수 밖에 없는 심경이 답답했었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 하나님이 진정으로 존재하신다면, 예수님이 진정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면 내가 일상 속에서 보고 듣고 만지는 세상 모든 만물처럼 하나님과 예수님도 그렇게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존재이기를 기대했었던 것 같다. 그런 나의 기대와는 달리 그 분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고, 들려 주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에서 조금씩 거리가 멀어진 것 같다.
2010년 1월 같은 질문을 나에게 던진다. 믿음은 느낌일까, 의지일까? 이제는 답이 달라졌다. 믿음과 하나님은 모두 인식에 속한다. 믿음은 내가 의도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내가 의지를 가지고 성경책을 읽고, 의지를 가지고 새벽기도에 가고, 의지를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과 믿음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 거추장스런 몸을 주신 분은 누구인가? 그 분은 왜 우리에게 몸을 주셨고, 그 분에게 저항할 의지도 함께 주셨는가? 애초에 만드실 때, 우리를 완벽한 종으로 만드셨다면 우리가 이토록 고통과 갈등 속에서 방황할 이유가 없었을 텐데, 왜 슈퍼에고를 만드시고 다시 걸리적 거리는 에고를 만들어 놓은 것일까? 하나님은 장난꾸러기?!
 나는 하나님의 종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친구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1991년도에도 이 사실을 알았지만, 나는 느끼고 싶었다. 만지고 싶었다. 느낄 수 없었고, 만질 수 없으므로 하나님을 부정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이 든다. 이 사실을 알고, 일상의 매순간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분과 대화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전부 인 것 같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조차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그 분의 종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 같다. 로보트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의 친구를 원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에게 의지를 주셨고, 의지를 사용해서 그 분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 같다. 야곱과 씨름해서 져주기도 하고, 모세와 협상을 해서 양보도 하고, 인간보다도 더 인간적인 하나님을 통해서 내가 어떠한 상황에 있던지 언제나 내 곁에 그 분이 계시다는 것을 믿을 수 밖에 없고, 그 분의 친구로 살아가기를 열망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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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과바위
일본차 캘리가 수입되면서 쏘나타와 그랜져와 비교하는 기사가 많이 나온다. 하지만, 차라는 것은 애초에 개발될때의 컨셉이라는 것이 있다. 캠리는 일본메이커에서 만들었지만, 일본의 소비자가 아니라, 미국소비자를 위해서 만들어진 차다.  차는 방안에 모셔 두는 전자제품이 아니라, 도로를 고속으로 달리는 물건이다. 그래서 그 나라의 도로사정과 운행스타일을 고려해서 만들어 진다. 아무래도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소비자들이 일본소비자들보다는 장거리를 운행할 일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도로의 포장상태도 생각보다는 그리 좋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미국에서 제작된 차들의 서스펜션은 대체로 무르다. 소파드리븐이라는 용어도 미국에서 생산된 차를 일컫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반해서, 일본의 도도는 직선주로보다는 곡선주로가 훨씬 더 많다. 곡선도로가 많은 지형에서는 소파드리븐카가 멀미카로 변신한다. 출렁출렁 배를 타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캠리의 2009년 일본판매량을 보면 월평균 200대가량이다.(지형이 비슷하거나 더 열악하다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수입되자마자 월 400대가량이 판맨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캠리가 나쁜 차라는 얘기는 아니다. 애초에 개발컨셉, 타겟소비자층에 따라서 차의 특성이 결정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따라서 애초에 쏘나타와 캠리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다. 
  다음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왜 무의한 일일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http://car.khan.co.kr/kh_car/khan_art_view.html?artid=201001281048482&code=92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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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8 20:50 김경은-자동차정보

 어떤 엔진이 좋은 엔진일까요? 용도나 특성에 따라서 다양하게 개발되기때문에 단편적으로 이 엔진이 가장 좋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정답은 없습니다. 다음 기사는 이러한 엔진에 관하여 정리해 놓은 기사입니다.

http://www.hani.co.kr/arti/economy/car/4015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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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과바위

자기 일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되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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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과바위

나는 두렵다. 그러나, 행동에 나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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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과바위
당신의 한 없는 넉넉함의 도구가 되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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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과바위
주님!
우리의 마음을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게 하소서

모든 불순한 생각과
모든 세상적인 욕망이
다곤의 우상처럼
매일 아침 언약궤 앞에서 부서지게 하소서

우리에게 혈과 육을 다스릴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
이렇게 우리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피의 제사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하소서.

"내가 날마다 죽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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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과바위

오! 하나님,
오늘 하루를 바르게 살기 위해
필요한 능력과 지혜를 허락하옵소서.
제게 닥쳐올 모든 시험을
능히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제게 맡겨진 모든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힘과,
제게 부여된 모든 책임을
감당할 담대함을 허락하옵소서.
말해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를
분별하는 지혜와,
나서야 할 때와 나서서는 안 될 때를
분별하는 지혜와,
자신이 견해를 표현해야 할 때와
잠자고 있어야 할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주옵소서.
그렇게 함으로
제가 오늘 밤 잠자리에서
기쁨과 행복과 만족을 느끼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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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과바위

주여!
오셔서 주의 보좌에 앉으시고 지배하소서!

안 그러시면 주께서 앉으셔야 할 보좌에
다른 것이 앉게 됩니다.
교만과 정욕, 더러움과 게으름이
저의 왕이 되려 하고,
분노, 증오, 불평이 밀려들어
저를 지배하려는 것을 봅니다.
그때마다 저는 소리 지릅니다.
'그리스도 밖에 왕이 없다!'라고

아, 평화의 주여!
오셔서 저를 지배하소서.
제게는 당신 이외에
왕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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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과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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